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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문칠 close-up>“거북선의 고향 여수에 쇠철”이 있었다

윤문칠 논설주간 | 기사입력 2021/05/13 [12:53]

<윤문칠 close-up>“거북선의 고향 여수에 쇠철”이 있었다

윤문칠 논설주간 | 입력 : 2021/05/13 [12:53]

▲ 윤문칠 전)전남도 교육의원     ©

1910년 외국에 우리나라 조선을 알리기 위해 한양에서 제일멀리 떨어진 여수의 목조건물 진남관과 거북선 사진을 넣어 그림엽서1호를 발행했다. 그때에는 한양, 부산은 외국인이 모르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알려진 이순신장군의 전라좌수영성이 있는 거북선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 태통령 취임식(1997)때 여수의 거북선 모형선이 가두행진에 참가하여 영어로 된 가두방송과 위용에 참관한 외국인들이 감탄하였다. 이와 같이 세계적으로 역사적, 문화적 전술적 과학적 가치가 입증된 거북선을 여수선소에서 신조하였다.

 

평화롭게 살던 우리나라는 왜군(1592, 4, 13)들이 15만 육해 병력을 이끌고 부산포에 침략을 하자 양반 집 자식들이 성주를 하던 당시 싸울 생각도 안하고 도망을 해버렸다. 그래서 경상남도가 3일 만에, 경상남북도가 7일 만에, 한양이 19일 만에 함락되고 한양에 있던 선조 이하 대신들과 가족들은 신의주 밑에 있는 의주로 도망갔다. 그런데 왜적이 들어오지 못한 땅은 호남 좌우도(현 전라남북도)뿐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일 년 전에 여수에 부임한 이순신장군은 당시에는 군사훈련소가 없었던 터라 직능별로 어부의 집안은 노군으로, 풀무(대장)칸을 하던 집안은 병기 제작으로, 목수는 병선 제작으로, 각각 그 기능에 따라 병사를 뽑았다 그리고 지시에 따라 거북선, 협선, 판옥선, 해골선을 만들고 예암산 아래 샛철(봉산동)에 용광로를 지어 봉강동 사토를 삶아 쇳물을 녹여 거북선 갑판에 심을 창살과 화살촉, 화포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동도 시누대로 화살을 만들며, 훈련과 성을 쌓는 등 모진 부역과 병역의무를 선조들은 수군세습제도에 묶여 차례로 징발되어 싸웠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한 진남관(국보 304)과 신비의 섬 사도 거북바위를 착안하여 선소에서 거북선함을 진수하고 사철소에서 무기를 만들어 왜구의 침입을 막았던 역사가 깊은 곳이다. 그래서 정부에서 발간한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 임진왜란 때 사철이 봉산동(鳳山洞)에서 1568~1609년 생산되어 무기 제작에 사용되었고, 1752(영조 27)에 절도사 정익량(鄭益良)이 사철고(沙鐵庫)를 설치했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여수시 봉산동에 전래지명으로 사철(沙鐵)이라 부르게 된 것이 새철 또는 쇠철로 그 음이 변하여 전해진 것이다.

 

당시 제철소 폐기물 처리장으로 추정되는 봉산동 33반과 4반 일대는 옛날식 돌담이나 주택 안마당 등에서는 지금도 슬래그(제철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을 쇠똥)와 내화돌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필요한 무기 제조와 병기 공급창 역할을 했던 제철(製鐵)터에 7개의 용광로가 있는 사철소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즈윽히 생각하니 호남 여수는 나라의 보장성이라 만약에 호남 여수가 없었다면 국가는 없었으리라. 그래서 학자들은 여수를 거북선의 고향, 구국의 성지라고 한다.

 

여수는 장군의 얼이 숨 쉬는 역사와 문화 전통이 살아 움직이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다닐 수 있는 자원을 기반으로 새로운 관광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차별화된 높은 가치를 보유한 도시이다. 그래서 봉산동 지역의 사철소를 복원하여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질 경우,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무기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4백여 년에 이르는 조선시대 여수의 제철·제련 기술 발달사를 연대기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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