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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한 지방관의 표상, 순천 팔마비 보물로 지정되다

청백리 순천부사 최석, 700년을 넘어 다시 순천에서 만나다

박미경 기자 | 기사입력 2021/04/11 [15:10]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 순천 팔마비 보물로 지정되다

청백리 순천부사 최석, 700년을 넘어 다시 순천에서 만나다

박미경 기자 | 입력 : 2021/04/11 [15:10]

팔마비에 깃든 순천부사 최석 청백리· 팔마정신계승

순천 팔마비의 청렴결백한 정신은 공직사회의 표상

대한민국의 최초 청백비로서의 의미 갖고 있어

 

▲ 김영득_ 팔마청백리 문화재단 이사장.

양력:

1959년 전남 순천 출신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 행정학 석사, 이하박사

순천 남산초, 매산 중·고, 순천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현) 팔마청백리 문화재단 이사장

현) 전라남도지사 특별보좌관현) 사단법인 한국레포츠연맹 총재

현) 대한체육회 남북교류 위원회 위원

전) 국민체육진흥공단 상임감사

전) 대한올림픽위원회(KOC)위원전) 서울시립대학교/한국체육대학교/순천대학교 겸임교수

전) 국민생활체육 전국태권도연합회장전) 18, 19 문재인 대통령 후보 체육특보

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수행국장전) 민주당 부대변인/ 정책위원회 부의장

전) 민주당 남북교류 특별위원회 부위원장  ©

대한민국의 최초 청덕비인 팔마비가 보물이 되었다. 순천부사 최석의 팔마정신을 통해 청렴을 약속하는 팔마비 보물 제2122호 지정 축하 행사가 13일 화요일 오전 11시 순천부읍성 남문터광장(순천시 영동 8번지)에서 진행된다.

 

 

팔마비는 자신을 드러내기 꺼려하며 공직자가 가져야 할 도리를 700여 년 동안 말없이 전하고 있다. 이 비는 지방관의 선정과 청덕을 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송덕비이다.

 

대한민국이 공정하고 청렴한 세상이 되도록 순천부사 최석의 청백리 및 팔마비에 깃든 청렴문화 시민정신을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16년 설립된 팔마청백리 문화재단은 팔마비에 새겨진 팔마정신의 문화가치를 재조명하고, 팔마정신 선양사업인 팔마청렴문화제가 2016년부터 개최되고 있다.

 

▲ 팔마비 전경.  ©



팔마비와 청백리 순천부사 최석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인 순천 팔마비는 순천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 고려 1281(충렬왕) 이후 승평부사 최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 승평(昇平)은 전라남도 순천 지역의 옛 지명으로 백제 때는 감평군, 신라 때는 승평군, 고려 초에 승주목, 고려 말에 순천부로 불렸다. 조선 초에 순천도호부로 승격됐다.

 

 

팔마비에 기록된 승평부사 최석은 고려사에도 등장할 만큼 당시 지역민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다. 최석은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기증받은 말이 오던 중 낳은 망아지까지를 합쳐 9마리를 돌려보냈다.

▲ 죽도봉 공원 정상에 위치한 팔마비를 형상화한 팔마탑.  ©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다. 이에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전해온다.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고려 때 문신 최원우(1347, 충목왕 3)는 오랜 세월 속에 쓰러진 전임 부사 최석의 팔마비를 다시 세웠다. 최석의 덕을 새겨 순천성 남문 연자교 남쪽 길가에 비를 다시 세웠는데, 그의 마음을 읊은 시가 승평지에 전하고 있다.

 

▲ 『고려사』 열전(列傳)의 팔마비 건립 기록.  ©



승평을 오고 가는 태수가 많았으니

보내고 맞이함에 농민의 시간을 빼앗음이 부끄럽구나

덕 없는 나와 같은 사람을 후세에 전하려 하지 말고

최석의 팔마비나 다시 일으켜 세우소.”

 

그 후 정유재란(1597) 때 또 허물어져 부사로 부임(1616)한 이수광이 그 이름은 넣지 않고 팔마비세 글자만 새겨 다시 세웠다. 지금도 옛 군청사 앞에 있다. 강남악부에는 이수광이 중건하고 지은 차운시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로부터 산천이 몇 번이나 변하고 옮겨졌을까

기반이 없어지고 매몰된 것이 이미 여러 번일세

이름은 굳게 새길 필요가 없네

호사자들이 입에서 입으로 비를 세워주리라.”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팔마비와 최석 부사 일화.  ©

 

또한 조선 4대 문종의 왕명을 받아 김종서 등이 고려시대의 역사를 편찬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20, 충렬왕 7)에는 아래와 같은 한시가 실려 있다. 

 

 

  

 

백도는 오군에서 물만 마셨거늘

유공은 일전인들 어찌하여 취하였나

암말 타고 왔는데 망아지 딸려 갔으니

이 망아지는 분명 내 것이 아니라네

그대는 남쪽 고을 팔마비를 못 보았나

여기 지나며 부끄럽지 않을 자 몇이런가

 

 

▲ 팔마청백리 문화재단 김영득 이사장(왼쪽)의 팔마 청렴문화제 행차 장면.  ©

 

 

 이 팔마비 전면에는 원진해(元振海)팔마비라고 양각했고, 뒷면에는 이수광이 쓴 팔마비 중건기를 김현성(金玄成)이 음각했다. 그리고 순천성 남문 연자교 옆에 있던 팔마비를 1930년 조선총독부가 시가지 정비 사업을 추진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1977년 비석의 보호를 위해 비각을 건립했다.

 

청백리(淸白吏)는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표창제도다. 살아 있는 경우에는 염근리라고 하고, 죽은 후에는 청백리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최석·최영·정몽주, 조선시대에는 맹사성·황희·이황·이이·이원익 등이 청백리로 녹선됐다.

▲ 팔마 청렴문화제 행사장.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순천 팔마비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한 문화재청은 팔마비는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의 최초 청백비로서의 의미 뿐 아니라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온다는 점에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높고, 청렴결백한 정신은 공직사회의 표상이 될 수 있다고 그 가치를 평가했다.

 

청렴의 고장 순천의 팔마정신은 순천시민의 자산이자 미래가치

 

▲ 팔마 청백리 문화재단 김영득 이사장의 팔마 청렴문화제 행사 진행 장면.  ©

순천시에서는팔마라는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팔마로, 팔마대교, 팔마경기장, 팔마문화제그리고 팔마 초··등이다. 그 이유는 바로 순천 향동에 있는 팔마비(八馬碑) 때문이다. 단순히 청백리로서의 모범보다 이전의 헌마제도라는 악습을 폐지하고, 궁핍한 승평부민들의 삶의 애환을 듣고 가까이 다가가려 했기에 부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최초의 송덕비로 유래된 팔마비가 던져주는 팔마정신의 교훈이다. 이것이 바로 순천의 정신이자 청렴의 고장 팔마로 불리는 연유이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청백리의 표상 황희, 맹사성, 최영보다 더 청렴한 우리나라 최초의 청백리 인물로 후대에 전해질 수도 있었지만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한 최석 부사의 성품으로 인해 승평부민의 마음속에 묻혀 있었다. 이처럼 공직자가 가져야 할 도리를 700여 년 동안 팔마비를 통해 묵묵히 전해져 순천시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하고 있다.

▲ 팔마 청렴문화제 시낭송 대회 장면.  ©


이에 순천시는 대한민국이 공정하고 청렴한 세상이 되도록 최석 부사의 청백리 및 팔마정신을 계승하여 미래 세대에게 선양하고, 팔마비에 깃든 청렴시민정신 문화계승사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팔마 청백리정신 선양사업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있다.

 

 

이처럼 순천인의 삶 속엔 청렴을 상징하는 팔마라는 이름이 유무형의 자산으로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 물리적·가시적 특징의 인위적 시설물이 아닌 상징적 가치성을 갖는 팔마비를 순천의 진정한 랜드마크화 하는 것은 순천시가 가지고 있는 자산이자 미래가치이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팔마청백리상을 제정해 시행하는 것이다. 이를 주관하는 팔마청백리 문화재단에서는 팔마비에 깃든 최석 부사 청백리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미래 세대에게 청렴정신을 선양시켜 청렴한 세상 공정한 대한민국을 위해 청렴문화를 실천한 공로자를 선정하여 팔마 청백리상을 시상하고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자신들의 이익만을 탐하는 관리들이 득세하던 고려말 혼란의 시기처럼 세상은 제 잇속만 챙기려는 비리로 얼룩져 있다. 헌마관례라는 악습을 폐지하고 애민정신으로 승평 부민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청백리 최석 부사의 선정과 청덕을 교훈삼아 우리 모두가 청렴한세상을 만들어 행복한 대한민국을 후대에게 선물하는 날까지 팔마정신을 마음 속에 담아야 한다.

 

 

김영득 이사장(팔마청백리 문화재단)더 나은 미래, 보다 청렴한 세상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도록 순천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청렴도시 순천선언문

 

순천에는 지방관의 선정과 창덕을 기리는 송덕비의 효시라고 알려진 팔마비가 있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며 공직자가 가져야 할 도리를 700여년 동안 말없이 전하고 있는 청백리 최석부사의 송덕비다.

 

단순히 청백리로서의 모범보다 이전의 헌마제도라는 악습을 페지하고, 오랜 전란으로 궁핍한 승평부민들의 삶의 애환을 듣고 가까이 다가가려 했기에 부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최초의 비로 유래된 팔마비가 던져주는 교훈 ···”. 청렴한 순천의 정신이다.

 

오늘 우리는 위대한 팔마정신을 계승하고 자발적 참여와 책임, 소통과 신뢰를 바탕으로 청렴문화를 정착시켜 순천을 청렴도시로 만들기 위해 모두가 최석이 되고자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하나,비리나 뇌물을 멀리하고 부패를 용인하지 않으며 이 사회를 깨끗하고, 투명한 대한민국과 순천을 만들어 가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

 

하나,각종 비리와 부패를 양산하는 일체 사회적 관행과 행정의 폐습을 퇴출하는 청렴문화운동을 전개한다.

 

하나,자율과 책임, 소통과 협치를 통해 사회적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자정능력을 강화하는 정신개혁운동을 전개한다.

 

하나, 정치, 지방자치, 종교, 경제, 예술, 사회복지, 언론, 공공기관, NGO 등과 함께 전 방위적 반부패 척결운동을 전개한다.

 

하나,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투명한 나라가 되고, 순천이 대한민국 제일의 청렴 도시가 될 때까지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시민운동을 할 것을 결의한다.

 

 

 

 순천 팔마비보물 제2122호 지정

순천 팔마비보물 지정 내용

 

지정명칭 - 순천 팔마비(順天 八馬碑)

지 정 일 - 2021325

지정번호 - 보물 제2122

 

지정사유

· 건립연혁

- 최초 팔마비는 고려시대 순천부사 최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건립됨

당시 이임하는 부사에게 말 8마리를 바치는 지역의 풍습이 있었으나, 최석 부사는 개경에 도착하여 자신의 집에서 낳은 망아지 1마리까지 9마리의 말을 순천부로 돌려보냄. 순천의 백성들은 최석 부사의 청렴함을 기려 최석의 팔마비를 건립함

- 이후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것을 순천부사로 부임한 이수광(1616)이 최석 부사의 청렴함을 담은 팔마비를 중건함(1617)

 

· 가치

- 고려시대 최초 건립된 이후 조선시대에 중건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순천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서 위상을 갖고 있음

- 1617년에 순천부사 이수광이 중건한 비의 실물이 현전하여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

- 팔마비의 주인공인 최석을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온다는 점에서 역사, 예술, 학술 가치가 높음

- 순천 팔마비의 청렴결백한 정신은 공직사회의 표상이 될 수 있으며, 대한민국의 최초 청백비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음

 

 

중건팔마비음기(번역문)

 

 

이수광(李晬光, 1563~1628)

 

내가 일찍이 동국여지승람을 열람하다가 최석(崔碩,1308)의 팔마비에 관한 일을 보고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병진년(광해8, 1616)에 내가 순천고을 부사가 되어 가장 먼저 옛 자취를 찾았더니 비석이 정유재란(1597)에 불에 타 없어지고 다시 세우지 못한지 20년이 되었다.

그래서 개연히 이를 다시 세울 방법을 모색하여 이 고을의 현명한 선비 허건(許楗)과 생원 정지추(鄭之推) 등 몇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재물을 모으고 돌을 다듬어 한 해에 낙성되었다.

 

! 최공께서 이 고을에서 있었던 일이 지금으로부터 400년이 되었으나 이 고을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함이 마치 어제 일인 듯하다. 비석은 비록 없어졌으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입의 비석은 오히려 건재하였으니 어찌 낱낱이 돌에 새길 필요가 있으랴.

그럼에도 드러내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장려하는 까닭은 비석에 남긴 사실을 결코 빠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부사 최원우(崔元祐, 1365)는 넘어진 비석을 일으켜 세우고 그 일을 시()로 지어 자랑한 적이 있다. 하물며 지금은 없어진 비석을 다시 세움에랴. 이후로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만약 청렴한 선비라면 한결 같이 기쁘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다스리는 일에 더욱 힘쓸 것이고 설혹 탐욕스러운 자라 하더라도 두려워하여 삼가는 마음이 움직여 불선한 마음을 고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석을 세우는 것이 벼슬아치의 본보기가 될 뿐만이 아니라 풍속과 기강에 관계됨이 매우 중대한 것이다.

세상의 이른바 유애비(遺愛碑)라는 것과 견주어 보더라도, 유애비는 단지 한때 지나간 사람을 그리워할 뿐 후세에 보고 느끼게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이 비석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짐을 기쁘게 생각하고 고을 사람들의 뜻을 거듭 아름답게 여겨서 그 전말을 대강 이 정도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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